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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수석역사에 대한고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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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수석넷 댓글 0건 조회 258회 작성일 17-07-09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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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수석역사에 대한고찰1 

1.수석의 기본사상 ( 佛敎思想 / 道敎思想 ) 
愛石文化는 그 근본이 우리의 정신문화가 근저에 깔려 있다. 그것은 불교와 유교 도교의 사상의 애석인의 기본적인 정서 에 깔려있어 그 배경이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 나라의 애석사는 초기 승려( 僧侶 )들과 유학자들에게서 출발한 것이 현 재의 문헌에서 나타난 특징이다. 

2. 元始 時代 : 약 5000년 전 ( 新石器 遺蹟 ) 
新石器時代에는 돌을 加工하여 돌칼, 돌화살, 돌도끼 등의 石器를 만들었으며, 이 흔적은 아시아 서부지방이나 중국 북부 의 고원지대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는 紀元 이후까지도 石器를 사용하며 삶을 이어온 흔적이 경기도 全谷 주변의 한탄강 줄기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을 위시하여 전국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3. 百濟 時代 
1) 辰斯王7년 392 년 路子工 ( 縮景造園기법 日本전수 ) 
자연의 경관을 정원에 造成하는 멋진 縮景造園의 훌륭한 기법을 日本에 가르쳐 준 사람이 바로 우리의 先祖인 백제사람 路 子工이며 그 뒤부터 일본에서도 石假山이 조 성되고 景과 수석의 始初가 싹트게 되었던 것이다. 

4. 新羅 時代 
1) 金 可紀 ( 문성왕 ) : ( 壽石 生活 )
당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 신선술 ( 神仙術 )을 좋아하여 중국에서 이름이 높았다. 당나라 종남산 (終南山) 자오곡 ( 子 午谷)에 살면서 수석과 아름다운 화초와 도리( 挑李 )등을 많이 심고 실내에 돌을 안치하여 선경( 仙經 )과 도덕경( 道德經 ) 을 읽었다. 이분은 도가사상( 道家思想 )에서 애석한 선인의 한 분이다. 

2) 勝 詮 法 師(호소왕) : ( 怪石資料 ) 
삼국유사(三國遺事) 우리 나라에서 愛石하여온 가장 오래된 기록은 멀리 천 여년 전 新羅時代로 거슬러 올라가 우리의 最 古史書인 三國遺事(1285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적혀 있다. 「勝詮法師는 돌의 무리들을 모아놓고 佛經을 論하고 강연했 으니 그곳은 萬項寺이니라 그 돌 80여 개는 지금까지 鋼司가 전하고 있는데 신령스럽고 이상한 것이 있다.」 

5. 高句麗 
1) 小獸林 王 2년 373 년 : ( 築山法 傳來 ) 
中國으로부터 築山法 ( 奇岩 怪石으로 築造하여 山을 만드는 것으로 石假山이라고도 한다)이 전래되었다고 한다. 

6. 高麗 時代 
1) 文 益漸 (1329~1398) : ( 怪石遺物 ) 
고려시대로 내려와서는 中國에 사신으로 가서 많은 風流를 보고 木花씨를 담뱃대 에 숨겨온 " 文 益漸 " 先生이 愛石하였 는바 그 實證으로 경남 산청군에 소재하고 있는 선생의 祠堂에는 지금도 많은 怪石과 奇石이 보존되어 있다. 

7. 朝鮮初中期 
1) 姜 希顔 ( 1417~1464년 / 世宗1~世祖10 ) 호 : 仁 齋 
石譜名 : 養花錄 ( 怪石 禮讚 ) 
朝鮮朝에 이르러서 愛石의 값진 古典으로 평가되고 있는 仁齊 姜希顔(書畵家)의 養花錄은 지금부터 약 530여 년 전의 기록임에도 怪石에 대한 감상과 연출 기법 등을 상세히 적어놓은 보배로운 책이다. 『怪石은 곧 굳은 德을 지니고 있으며 참으로 이것은 君子의 벗이 됨이 마땅하다』라는 괴석 예찬도 아끼지 않았으며 世祖 때의 서화가로 훌륭한 怪石圖도 많이 그렸다. 세종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인 인수부윤( 仁壽府尹 )을 지냈다. 특히 필체는 유명하여 세종왕이 옥새 를 부탁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문신( 文臣 )중에 으뜸가는 존재라 느껴진다. 말년에는 돌과 시, 서화로 소일하며 애석인으로 살았다.

2) 성 임 ( 成任 ) ( 1421~1484년 / 세종3~성종15 ) 호 : 安 齊 
石假山記 ( 壽石감상 / 石假山記 ) 
이조 판서를 역임한 이조 초기의 애석가의 선구자 역할을 하신 분이다. 안제( 安齊 )는 일찍이 자기 집 뒤에 기이한 돌을 모아 산을 만들고 이름을 석가산이라 하였으며 높이는 한길이 되었다. 석가산기( 石假山記 )에 보면 바위가 절벽 을 이루 어 시내를 배고 있는 것 같으며 바위 위에 장막을 둘렀던 우묵한 곳이 있다. 바위가 층층으로 포개져 계단과 같으며 분류 ( 分流 )가 어지러이 쏟아지는데 청천( 晴天 )의 우뢰처럼 귀를 시끄럽게 한다. 맑고 말은 돌은 희어 선경( 仙境 )이 완연( 宛然 )하니 와서 노는 의관자( 衣冠者 )들이 그치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3) 성 현 ( 成俔 ) (1439~1439년/세종21-연산10) 자: 경숙 磬叔, 호: 용제 浮休子, 虛白堂 
石假山記 ( 수석감상의 경지 ) 
애석인 가운데 약 500년 전에 석가산( 石假山 )을 만들 어 풍류호종( 風流豪從 )한 기계를 가진 애석가로 이조 초기의 명신이며 학자이다. 성현은 맏형 성임을 따라 중국 연경( 燕京 )에 갔을 때 기행시( 紀行詩 ), 관광록( 觀光錄 )을 지어 중국 학자들을 탄복 시켰다. 당시 명나라의 서가이며 애석가인 이공동( 李空洞 1472 ~1509년 )과 교유하게 되어 애석 취미에 더욱 관심이 컸다. 1474년 성균관 직강으로 임명되어 성종 5년 그 이듬해 한명회( 韓明澮 )를 따라 또 다시 중국 연경에 다녀 왔다. 2차에 걸친 중국연경 행은 이공동과의 교유를 통하여 애석 취미는 드디어 석가산( 石假山 )을 만든 경지에까지 도달했다. 석가산은 성임, 성현 두 형제가 자연미 축경에 다 같이 공통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집 뒤 빈땅에 돌을 모아 산을 만들어 높이가 근 한길이나 되고 뭇 봉우리가 높이 솟아 중앙의 봉우리를 보고 절을 하는 것 같으며 뭇 골짜기는 겹겹이 싸여 동부( 洞府 )가 되어 있고 옆 봉우리와 가로놓인 산마루가 면면히 겹겹이 쌓여 기이한 현상을 하여 마치 삼산( 三山 ), 삼신산( 三神山 ), 오악산( 五岳山 ), 태산( 泰山 ), 관산, 항산( 恒山 ), 산고산( 山高山 ), 숭산을 모아 한 덩어리로 만든 것 같다. 석가산부( 石假山賦 )는 이와 같이 용제 성현의 수석취미가 전아( 典雅 )한 경지에 서 호종( 豪從 )한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4) 이 황 ( 李 滉 ) ( 1501~1570년 ) 호 : 퇴계( 退溪) 
紋樣石을 즐기며 愛石 ( 애석 생활 ) 
이황은 이이( 李珥 )율곡과 함께 우리 나라 유학사상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주자( 朱子 )의 이기이원론( 理氣二元論 )적 사 상을 계승하여 그의 사상을 발전 시켰다. 그는 학문에 임하여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유학자로선 수석의 세계에 처음 등장한 인물이라 하겠다. 선생의 수석 일화 중에 명종 초 1548년 10월 단양( 丹陽 )군수에 서 풍기( 豊基 )군수로 부임할 때의 일이다. 평소에 애석했던 장석( 掌石 )손바닥만한 돌만 지니고 말 한마리에 선생의 소지 품을 싣고 떠나셨다는 일화에서 선생의 고매한 인품을 접할 수가 있는 있다. 선생의 유명한 사단칠정(四端七情)론으로 우 리 나라 유학자로서 이 문제에 언급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를 던진 것이다. 그의 학설은 일본에도 큰 영 향을 끼쳐 메이지 시대 (明治 時代 )의 교육이념의 기본정신을 형성하였다. 선생의 단양 군수기간은 6개월 밖에 안되지만 “상성암”과 목순동에서 즐겨 탐석 하였다. 

5) 홍만선(洪方選)(1643~1715년 /인조21-숙종41) 호: 유암(宥岩)
愛石記錄 : 산림경제( 山林經濟 ) (양석법 제시)
산림경제( 山林經濟 )는 사회 경제 사상을 함축한 가치 있는 저술로서 이조시대의 대표적인 과학서 중 하나다. 이 저서 가운데 괴석( 怪石 )의 란에 수석의 이론과 산지 양석 방법 수석의 석창포를 심는 방법, 돌에 이끼를 붙이는 법 등을 기술하 고 있다. 300여 년 전에 전통적인 수석문화가 정립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송도( 松都 )의 남쪽 20여 리에 경천 사 ( 敬天寺 )가 있다. 절에서 북으로 3,40리 가면 많은 수석이 나온다. 석색은 청백하고 산봉우리는 높고 산언덕은 가파르 며 낭떠러지는 골이 생 겨 구름이 번개를 감싸고 있다. 이와 같은 산수경석의 형태를 지닌 돌이 산출되고 수반에 물을 넣어 안치하여 보면 물이 자연으로 돌의 정봉( 頂峰 )까지 빨아올려 일중에도 마르지 않는다. 이끼가 반란( 班爛하여 그 형모( 刑 模는 심수향( 沈水香 )과 닮았다. 때문에 이것을 심향석이라 이른다. 실로 천하의 결보( 結寶 )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수석 산지는 신계( 新溪, 안산(安山), 수락산, 단양, 풍천 등 각 지방의 석질 등을 구명 마분(馬糞)을 이용하여 이끼를 양 석 석부 하는 방법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300년 전에 유 암( 流岩 )선생은 수석전문가로서 높이평가 된 다. 우리 나라 수석 문화의 이론체계가 1670년 전후로 정립되어 온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바로 산림경제에서이다. 

6) 茶山 丁 若鏞 )(1762~1836년/영조38-헌종2) 
호: 다산(茶山)(수석생활) 
문장과 경학(經學)에 뛰어났으며 수원성 ( 水原城 )을 쌓을 때는 기중가설 (起重架說)에 의한 활차녹로를 만 들어 과 학 적인 기술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당대에 배출한 문신 중 군계일학이었다. 신유사옥( 辛西邪獄 )이 일어나 강진 ( 康 津 )으로 귀양갔을 때. 선생은 강진에서 19년간 독서와 저술에 힘쓰는 한편 애석 취미에도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경세유표( 經世遺表 ) 목민심서( 救民心書 ) 흠흠신서( 欽欽新書 )등 그의 대부분의 저서는 이 귀양지에서 완성되었다. 다 산은 조선학계에 전개된 진보적인 신학문을 집대성한 실학파의 대표이다. 수석취미는 여가의 정신적 위안을 안겨다 준다. 참담한 귀양생활에서도 명석 한점 한점에 심취하여 자신의 생활을 찾았다는 것에 무게를 두고 싶다. 

7) 秋史 :金 正喜 (1786~1856년/정조10-철종7)(명필전래 / 수석선물) 
名筆 :「天下怪石」「壽石老笞池館」「山水石」
秋史가 손수 쓴「天下怪石」「壽石老笞池館」「山水石」등 天下名筆이 지금도 拓本 또는 寫本 그리고 書刻으로 보존되어 내 려오고 있다. 서예가로서 혹은 고증학자, 금석학자로 유명한 秋史는 20세 때 아버지 노경( 魯敬 ; 이조판서 )을 따라 연경( 燕京 )에 가서 당세의 거유( 巨儒 )로 명성을 떨치던 완원( 玩元 ), 옹방강( 翁方綱 )등과도 막역하게 지냈으며 완원은 자기 가 지운 소재필기( 蘇齋筆記 )를 처음으로 초해서 완당에게 기증까지 하였다. 완원은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애석가며, 그의 애장석 가운데 하산욕우( 夏山欲雨 )란 명석(銘石)을 같이 선사하여 추사를 놀라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추사선생의 애석은 여기에서 출발하여 1840년 헌종6년에 제주도로 유배되면서 이곳에서 탐석 활동과 깊은 인연을 맺어 애 석인으로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 이름이 남겨지고 있다. 

8) 香石 金 容鎭 ( 애석생활 ) 
아픈 병석에서도 애완하던 돌을 옆에 두고 어루만지다가 끝내는 禪의 境地에 이르러 運命할 때 幽宅에까지 가지고 갔다고 한다. 이처럼 죽어서도 못 잊는 돌의 참 멋은 작은 돌 속에 우주와 삼라만상이 깃 들어 있고 太古 의 神秘를 품은 채 無心 한듯 하면서도 詩情과 情趣를 풍겨 주는데 있을 것이다. 

9) 孤山 尹 善道 ( 五友歌 ) 
文獻名 : 五友歌(弟五君子/五友歌) 
옛 선비들이 無我의 경지에서 세월이 담긴 돌 하나를 文匣 위에 놓고 太初의 피부를 어루만지며 바라보는 風流는 神仙의 경지까지 이끌어 주었으며 이 氣品을 사랑하여 文房의 第五友이자 弟五君子로서 愛玩해 왔던 것이다. "내 벗이 몇인고 하니 水石과松竹이라, 東山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孤山 尹善道가 五友歌에서 읊었듯이 이 水石과 松竹 그리고 달의 다섯 친구면 지금도 만족을 느낄 것이다. 

10) 貫齊 李 道榮 / 小琳 趙 錫普 / 春谷 高 義東(米揷 拜石圖 계승 화백)/畵風繼承 
米揷의 拜石圖를 줄여 말하면 中國 北宋時代에 이름난 書畵家인 미불은 평소 돌을 미치도록 愛玩한 愛玩家로서 어느 날 고을 太守로 부임하는 길모퉁이에서 그가 항시 흠모하던 奇岩 怪石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큰절을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매일 찾아와 큰절로 문안을 올렸다고 한다. 이런 故事에서 취한 그림으로 이 전통을 계승한 화백으로는 貫齊 李道榮, 小琳 趙錫 普과 얼마 전에 作故한 春谷 高義東이 있다. 

8.朝鮮 後期 時代 
1) 大 院 君 (壽石演出) 
근세에 와서 돌과 蘭에 탁월한 심미안을 가졌던 大院君이 손수 설계 감독한 운현궁의 뜰이 있다. 養口의 직곡 산방, 마포의 아소정, 자하문 밖의 별저 등이 옛날의 古淡한 情趣를 품고 있다. 그 당시 대원군이 손수 어루만지며 愛玩하던 돌이 전래되 어 현재 수석계의 元老이신 韓기澤 박사가 소장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 先祖들이 돌의 韻致를 귀히 여겨 아끼고 사랑한 격조 높은 피가 오늘날 우리들 몸에도 흐르는가 보다. 지금도 古宮에 가면 品位있고 氣品있는 奇石, 怪石 등이 많이 눈에 띈다. 昌慶宮, 藏書閣 앞, 昌德宮 樂善齊正堂 뒤와 長樂門 앞 등 엔 돌 화분에 세워진 奇石들이 옛사람들의 얼을 간직한 채 묵묵히 옛스러움을 말해주고 있다. 
조금 아쉽다면 그 돌의 産地와 年代 그리고 由來 등을 기록한 문헌이 없어 답답하고 안타깝지만 그러나 이렇듯 宮中에서도 돌을 사랑해 주었다는 것으로 흐뭇함을 금치 못한다. 

2) 詩人 趙芝薰 
“돌의 맛, 그것도 落木寒天의 이끼 마른 수석의 묘경을 모르고서는 東洋의 진수를 얻었다고 할 수 없다”라고 詩人 趙芝薰은 못을 박기도 하였다. 

3) 朴斗鎭(詩的探究) 
文獻名:「水石 列傳」 
抽象石에 心醉한 詩人 朴斗鎭은 스스로 探石한 돌에서 詩想을얻어 읊은「水石 列傳」이라는 돌 詩集을 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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