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계 동향(動向) 2 페이지 | 수석넷™

수석계 동향(動向) 2 페이지

본문 바로가기
  • 회원로그인

    아이디 비밀번호
  • 접속자 92
  • 쇼핑몰
  • 커뮤니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석계 동향(動向)

Total 62건 2 페이지
  • 47
    작성자 수석넷 작성일 07-14 조회 285
    우리는 종종 전부 그렇다 아니면 전부 아니다 식의 흑백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내가 주장하는 것만을 내세우고 다른 의견은 모두 배척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혹 우리 수석계에도 그러한 사고 방식은 없는지?수석만 해도 그렇다. 남한강 돌만 최고라고 한다거나, 강돌만이 수석이다라고 하거나, 해석을 즐기는 사람보고 돌도 돌 같지 않은 것 가지고 요란 떤다고 하는 사람들은 혹시 없는지? 또 해석만이 최고라며 해석만을 고집하고 내세우지는 않는지? 수석에 대한 가치 기준은 계속 변화한다.초창기에는 오석만이 수석이라고 초코석도 줍지 않던 때가 있었다고 하며, 꿈 같은 이야기지만 크기도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 내외의 표준 크기만을 고집하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또, 대작이라고 하여 큰 돌을 선호하여 소품은 구박(?)하던 시대도 있었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 하나! 예전(1980년대 초이다) 돈암동에서 수석상회를 하던 분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그 분은 나이에 비해서 일찍 수석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충주에 살면서 연세가 많은 원로급 수석인을 따라 탐석을 다니면서 수석을 배웠는데, 그 분은 표준 규격의 오석으로 딱 떨어진 경석만을 수석으로 탐석하여 자기도 그렇게 배웠단다. 그런데 하루는 전부터 알고 지내는 한 분이 자기가 그 동안 돌을 많이 탐석하여 뫃아 놓았는데 한 번 와서 보아 달라더란다. 가서 보니 자기가 배운 바와는 전혀 다르게 오석이 아닌 초코석이나 청석질등으로 된 돌들로 특별한 경이 잘 안 나오더라도 푹푹 변화가 좋은 돌만 잔뜩 뫃아 놓았더란다. 그래서 자기가 배운 바를 털어 놓으니 아무소리 않고 미소만 짓더란다. 나중에야 그 분이 자기보다 훨씬 앞선 안목을 가진 것을 알고 후회가 되었더란다.옛날 분들도 바닷돌을 외면만 한 것은 아니다. 강돌을 기준으로 해서 그야말로 똑 떨어진 특별한 것은 당시에도 귀하게 여겼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서울 광희동에 사셨던 고참수석인 댁에 소장석을 구경하러 갔다가 희한하게 생긴 수석을 보았는데 그 돌이 바로 바닷돌이었다.  지금 사유석으로 분류되는 계통의 돌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둥그런 돌에 작은 둥그런 돌이 혹처럼 붙어 있어서 당시에도 참 희한한 돌이라고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다만 문양석 종류는 똑 떨어진 것만 대접 받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외면 당하였던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어떤가?옛날에 별로 알아주지 않던 추상 문양석 같은 돌들도 버젓이 전시회에 나오며, 또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을 정도로 인정 받고 있지 않는가? 수도권인 안양에서조차 바닷돌 전시회가 열리지 않는가?옛날에 바닷돌을 우습게 여기던 사람들도 암암리에 바닷돌을 소장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산돌도 마찬가지이다. 물씻김이 되지 않았다고 무조건 내치지는 않는가? 비록 물씻김이 부족하더라도 오랜 세월동안 풍화작용에 의해서 군살은 다 빠지고 뼈만 남은 괴기스런 변화나 미세한 주름은 강돌에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산돌만의 특징인 것으로 높이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돌이라고 그 돌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을 우습게 보지 말고, 그 사람들이 왜 그 돌을 좋아할까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그 돌의 참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그 이유를 배우자! 내 안목이 짧음을 인정하고 강돌, 바닷돌, 산돌(토중석)을 가리지 말고 그 돌들의 특징을 이해해서 내 마음에 와 닿는 돌이면 다 좋아하고 귀하게 여기자.한가지 음식만 좋아하면(편식하면) 영양에 불균형을 이루는 법이고,편견에 빠지면 시야가 좁아져서 많은 것을 보지 못하니까...편식과 편견을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미적 감각을 키워 나가자. 글쓴이 遇石 鄭 遇 權 http://www.wseok.com/  …
  • 46
    작성자 수석넷 작성일 07-14 조회 352
    혜전(惠田) 宋成文 회장의 대표적인 수석 '남한강의 魂'이 국립 중앙박물관에 당당히 문화유산으로 전시되고있다. 참으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고 壽石界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아래의 글은 이번 국립 중앙박물관 수석 기증의 의미를 제대로 정리해주고있다.수석이 취미의 차원을 넘어 문화재로 자리매김 했다는 점, 이번 일을 계기로 수석계의 과제와 나아갈 방향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등을 짚어주고 있다. 수석과 문화유산글 편고재 주인 이규진 유산은 크게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으로 나눌 수 있다. 문화유산이란 인간이 고대로부터 문화적 활동을 통해 만들어낸 것을 말하며 자연유산이란 말 그대로 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순수한 자연의 부산물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하면 수석이란 어떤 유산에 속할까, 수석은 자연이 빚어낸 것임으로 마땅히 자연유산이란 것이 그동안의 통설이었다.그러나 과연 그럴까, 물론 한 점의 돌이 강이나 바닷가에 버려져 있을 때 그것은 분명 자연유산이다.수 만 년의 세월을 두고 물과 모래와 세월이라는 풍화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으로 인간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체로 돌은 수석이 되지는 않는다.수석이 되기 위해서는 선택(탐석)을 하고 양석을 하고 연출을 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는 일종의 문화행위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돌이 아닌 수석은 분명 문화유산에 해당될 수가 있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근래 壽石界에는 아주 경사스런 일이 있었다. 국립 중앙박물관이 수석 한 점을 기증 받기로 한 것이다.국립 중앙박물관이라면 우리 문화유산의 정수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寶庫가 아닌가.그런 국립 중앙박물관이 기증을 받기로 했다는 사실은, 수석도 이제 당당히 문화유산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수석계로서는 정말이지 쌍수를 들어 환영하며 기뻐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수석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만든 장본인은 다름 아닌 혜전(惠田) 宋成文 회장.송회장이라면 몇 년 전 평생을 헌신해 수집한 국보와 보물 스물여석 점을 국립 중앙박물관에 기증해 세상을 놀라게 했던 분이 아닌가.그런 송회장이 이번에는 개인 石室로 운영 중인 헤전 석실에서도 자장 대표적인 '남한강의 혼'을 국립 중앙박물관에 기증함으로써 꼬 한 번 나눔과 비움의 미덕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이는 송회장의 기쁨이요 보람일 뿐만 아니라 수석계의 영광이자 경사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이다.하지만 필자는 이와같은 경사스러운 일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수석계에 대해 적지 않은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수석이 공식적으로 문화유산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해서 모든 수석이 타당성을 인정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석보나 수석 잡지를 보다보면 몽돌이나 잡석에 불과한 것들이 버젓이 수석이란 이름을 달고 행세하는 것을 볼 수 있다.또 수석인들이 다른 취미 인구에 비해 많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그만큼 티가 많아 수석계의 질을 저하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수석의 공식적인 문화유산화.이를 계기로 수석계는 가일층 반성과 새로운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거품과 허상을 걷어내고 진정한 의미의 수석 본연의 길을 찾아내는 일. 그리고 알게 모르게 침투되어잇는 일본의 영향을 탈피해 우리 고유의 美感을 찾아내 정립하는 일도 시급한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이러한 계기와 시발점으로 작용할 때, 송성문 회장의 국립 중앙박물관 수석 기증이 갖는 값진 의미는 더 큰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 45
    작성자 수석넷 작성일 07-14 조회 316
     중국 하이난(海南)서 선보인 세계 최대 규모의 '야명주(夜明珠, 고대 전설에 나오는 어두운 데서 빛을 내는 진주)'의 모습이다.궈지짜이셴(国际在线)이 22일 보도에 따르면 이 야명주는 직경 1.6미터, 무게 6톤에 달해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가치가 무려 22억위안(3천7백억원)에 달한다.또한 지난 2007년 네이멍구(内蒙古)에서 발견된 야명주는 당시 원석이 가다듬어지지 않아 일반에 공개되지 않다가 3년간의 가공작업을 거쳐 중국 최초로 시민들에게 선보이게 됐다. 이 야명주는 앞으로 하이난성 원창(文昌)시 바오위(宝玉)궁에 전시돼 시민들에게 공개된다. [온바오 강희주]ⓒ 중국발 뉴스&정보-온바오닷컴(www.onbao.com) 자료출처: 온바오 www.onbao.com/ …
  • 44
    작성자 수석넷 작성일 07-14 조회 259
     중국 언론에 따르면, 자오즈창(趙志強)은 허베이성 바오딩(河北省保定)시의 수석 수집가다. 최근 그는 2년에 걸쳐 ‘청명상하도’ ‘수석판(奇石版)’을 제작해 냈다. ‘청명상하도 수석판’은 길이 7.5미터, 너비 0.7미터로서 수석으로 ‘청명상하도’를 그려낸 작품은 중국에서는 최초라고 언론은 전했다. 자오쯔창의 작업실은 구석마다 모두 가지각색의 기이한 형상의 돌덩이가 가득 차서, 실내에는 좁다란 ‘인도’만 남았다고 한다. 지저분한 작업대에는 풀(膠水), 돌덩이 등 각종 재료가 널려 있다. 자오쯔창은 자기는 방안에 돌덩이가 몇 개가 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자오쯔창은 기자에게 알려 주었다. 그는 8년 전 영국에 시찰을 갔다가 길에서 돌덩이를 파는 노점을 보고 호기심에 운석(隕石)과 국석(菊石) 화석을 샀는데 이때부터 서서히 수석에 흥취를 갖게 됐고 나중에는 푹 빠졌다고 한다. 수석을 찾아내 소장하기 위해 그는 10년이나 종사했던 전문매니저 직을 사직해 버렸다.  더 보기 >>>> 자료: NTD Television & www.ntdtv.com…
  • 43
    작성자 수석넷 작성일 07-14 조회 299
     사찰 경내에 최초로 건립된 ‘불교수석 전시관’이 개관기념 전시회를 마련해 눈길을 끈다.고불총림 장성 백양사(주지 진우스님)는 성보박물관내에 별도의 공간인 ‘백양사 학봉선석원’개관 기념 오백나한 특별전시회를 17일부터 11월 30일까지 43일간 개최한다.학봉선석원은 고불총림 방장 지선스님이 40여년간 수집한 수석 550여점을 모아 지난 4월 개관했다. 지선스님의 법호 학봉에서 이름을 땄다.국내 사찰에서는 처음으로 설립된 학봉선석원은 100여 평 규모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으며, 특별 전시 기간 동안 ‘오백 나한상’을 일반에 공개한다. 지선스님이 처음 수석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천지 기운과 산천 정기가 왜 하필이면 불교의 깨달음, 도에 관한 형상이나 문양 및 의미 등이 담긴 돌들을 자연스럽게 많이 만들어 냈을까 하는 화두에 천착하면서 부터다.지선스님은 “물아일체라 하지만 두두물물이 이와같이 법신의 화연으로 무정물들까지도 유정들을 각성시키는 상호연기적 관계에 있다는 점 때문에 나도 돌이 되고 돌도 내가 되는 수없는 깨달음을 주고 받으며 돌에서도 법을 구할 수 있었다”고 그간의 수집 과정을 회고했다.지선스님의 수석은 부처, 달마, 나한상 등의 형태를 갖춘 형상석과 무늬가 새겨진 무늬석이 주류를 이룬다. 이번에 선보이는 수석 외에도 1천여 점이 ‘선석원’ 뒤편 수장고와 지선스님이 자주 머무는 광주 문빈정사에 빼곡히 쌓여있다.지선스님의 열정과 구도정신으로 선보인 백양사 ‘학봉 선석원’은 21세기 산중불교가 나아갈 혁신적 문화콘텐츠를 제공한 신선한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자료출처: 불교포커스 http://www.bulgyofocus.net/news/articleView.html?idxno=71515  …
  • 42
    작성자 테스 작성일 07-14 조회 267
    옛날 강천산 산골에 살던 한 청년이 병든 어머니를 위해 산삼을 찾아 헤메다가 달빛에 비친 산삼을 발견하고 정신없이 달려가다 그만 폭포에 빠지고 말았다. 때마침 폭포 아래 용소에서 목욕을 하던 선녀가 청년을 발견하고 어머니를 향한 그 청년의 효심에 감동한 나머지 산삼을 찾아주고 둘은 곧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옥황상제는 그 둘에게 천년 동안 폭포에서 거북이로 살다가 천년이 되는 날 동트기 전까지 폭포 정상에 오르면 하늘로 올려 주리라 약속을 했다. 마침내 천년이 되는 날... 두 거북이는 폭포 정상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암 거북이를 먼저 정상에 올려 보내고, 숫 거북이가 정상으로 오르려는 순간, 그 들을 시기한 호랑이의 공격을 받고 싸우다가 그만 동이 트고 말았다. 이를 지켜보던 옥황상제는 이루지 못한 그 들의 애절한 사랑을 영원히 지켜주고자 그 들을 바위로 변하게 했다. 이 후 사람들은 그 바위를 거북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 거북바위 전설에서-절벽을 기어 오르는 거북이와 위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거북이의 모습 …
  • 41
    작성자 수석넷 작성일 07-09 조회 321
    자연의 아름다움과 축경(縮景)의 오묘함을 야외에 나가지 않고 실내에서 일목요연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작은 돌. 이 자그마한 돌은 한 개의 자연석으로서, 첫째 산수의 온갖 풍경을 연상시키며, 둘째 형상의 기묘함을 나타내고, 셋째 회화적인 색채와 무늬의 아름다움이 조화되고, 넷째 환상적인 미감을 발산한다. 그리고 수석은 인공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자연의 모습이어야 하고, 두 손으로 들고 볼 수 있는 작은 돌로서 작을수록 좋다.대자연의 풍경을 뜰 안에 조성하는 축경조원(縮景造園)을 일본에 가르친 사람이 백제 사람 노자공(路子工)이며, 이로써 일본에서도 분경(盆景)과 수석의 시초가 싹트게 되었다. 한 개의 작은 자연석을 애완해 온 태초의 기록은 약 3000년 전에 펴냈다는 중국 최고(最古)의 지리서인 《서경(書經)》의 우공편(禹貢篇)이나, 주대(周代:BC 1121)의 《시경(詩經)》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또 중국 당(唐)·송(宋)·명대(明代)에도 열렬히 애석해 온 기록이 풍부하게 전해지고 있다. 한국은 신라 때에 승전법사(勝詮法師)가 괴이한 돌의 무리들을 모아놓고 불경을 논의하고 강연했다는 기록을 비롯하여 조선 전기 강희안(姜希顔)의 저술인 《양화소록(養花小錄)》에 수석을 누리는 경지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겨레그림[民畵]이나 고서화에도 수석을 누려온 기록이 가끔 나타나고, 특히 추사(秋史)·다산(茶山)이 돌을 완상(玩賞)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비원 창경원에 정석(庭石) 수십 점이 배열되어 있으며, 운현궁에서도 그러한 광경을 볼 수 있다. 이 정석들에 대한 내력과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궁궐과 호사가들의 정석 괴석들을 살펴보면 유별나게 길쭉하게 치솟은 큰 모습을 보이는 것들이 많은데, 이것들은 음양(陰陽)의 이치를 품고 있다. 단조롭게 비쭉 치솟은 형태는 양이면서, 골이 패인 양상은 산수미를 나타낸다. 아래쪽에 깊이 패인 구멍은 음을 상징하여 전체적인 음양의 조화를 결속시켰다. 이러한 전래적인 애석 기풍은 한국 특유의 전통이다.
  • 40
    작성자 수석넷 작성일 07-07 조회 513
    좋은 문양석의 조건은 1.구도를 갖출 것, 2.주제가 있을 것, 3.객관성을 갖출 것. 이다.   다음 문양석의 본체인 모암도 상당히 중요하여 여기에도 50점을 주고 싶다. 해석에서의 모암에 대해 전체적으로 간단히 말하면 결점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깨끗하고 격이 있어 보인다.   먼저 해석은 모암의 외형이 둥글어야 한다. 이것이 기본임으로 둥글지 않으면 큰 결점이다.   다음 얼과 파가 없어야 한다. 얼과 파가 있으면 문양을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된다.    다음 사선이 없어야 좋다. 어느 분은 사선은 화가가 그림 그리다 망치게 되면 'X'자로 선을 그어 파기해버리는데 사선은 그와 비슷하다고 말씀 하시는 분도 있는데 암튼 사선이 있으면 문양이 깨끗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모암의 석질이 좋아야 한다. 그래서 표면이 매끄럽게 마모가 잘 되어 있어야 한다. 석질이 좋고 수마가 잘 되어 있으면 표면이 매끄럽다. 즉 좋은 해석이 되려면 모암의 조건이 1.둥글 것, 2.얼,파,사선이 없을 것, 3.석질이 좋을 것. 이다.이러한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해석이 깨끗하고 격이 있는 고급 돌로 명석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많은 석인들이 훌륭하다고 인정할 만큼 빼어난 수석이 명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산지에 가서 탐석을 해보라. 이러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해석을 하기란 하늘에 별따기이다. 정말 일생일석처럼 어렵다. 그렇다고 수석취미를 접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명석만이 수석이 아닌 것이다. 결점이 한 둘 있는 소박한 돌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며 즐기고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문양석에서 문양이 좋다면 얼이 있어도, 모암이 조금 좋지 않아도 한 둘의 결점은 따뜻한 마음으로 보듬어 안고 즐기면 좋을 것이다.   단 너무 결점이 많아지면 돌이 지저분해 보여서 아름답기 보다는 추해보이며 수석미를 느낄 수 없고 오히려 혐오스러워져 멀리 기피하게 된다. 여기서 결점이 너무 많은 돌은 배제하면 된다.   수석가게처럼 가격이 나가는 수석을 확보하여 유통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한둘의 결점을 커버하고 전체적으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그러한 해석이라면 개인 소장자로써는 소박한 수석으로 충분히 소장하고 감상할 가치가 있다 하겠다.   산지도 고갈되어 점점 명석을 소장하기 어려운 마당에 소박한 수석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굴하여 즐길 수 있다면 우리 보통의 수석인으로써 행복한 일일 것이다!   참수석님의 글 중에서......…
  • 39
    작성자 수석넷 작성일 07-07 조회 882
    애석의 미락감탄의 수석감  자연석을 취미의 대상물로 삼고 있는 수석인들은 돌 속에 내재된 아름다움과 신비를 찾아 즐기는 것이므로 절경이나 절승지의 명칭을 대입해 호칭으로 사용하고 또한 호칭을 통해서 절경과 절승지들을 연상 할수있게 된다. 산,폭포,계류,바위,단애,포구 등의 형태를 일걷는 지명이 적용되는 수석감에서는 일품석으로 취득해 소장하게 된다. 그러나 사진에 나타나는 평가기준과 수석으로서의 대상물로 가치 부여나 시시비비는 판이한 결과로 귀착됨을 본다. 언제나 완석 (玩石)은 수석의 삼면법에 적용시켜 논할때가 많다. 사진은 어느 방향으로 촬영해도 찍히는 부분만 나타나고 그림으로 그릴때는 ‘큐비즘기법’ 으로 뒷면의 상상도를 추이 할수 있게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수석적인 참뜻과 가치는 감상될 수 있는 현품일 때만 부여된다. 그 밖의 형태로 나타날때는 추상석이란 모호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抽象과 推想을 혼동하여 사용한다. 모호한 형태는 무조건 추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무리가 있으므로 抽象과 推想을 구별하여서 사용하여야만 올바른 애석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수석은 격상된 대상물이나 형태를 말하는데 이러한 격상된 대상물이나 형태는 감상자의 내적 깊이만큼이나 감상도의 깊이가 차이난다. 다시말하면 수석의 매혹도나 판단되는 마음이 작용하기 때문에 감상자에 따라 다르게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감상자의 정신이 돌에 이입될 때 감동되어 눈이 번쩍 떠지게 전율이 체험할수 있다. 신의 장공(rKI)은 양각(陽刻) . 음각(陰刻) . 투(透) . 조(調)로 수석감을 빚고 그 만들어진 형태에 색을 내포시켜 수석이라는 작품을 완성한다. 이렇게 형태를 만들고 색을 칠하는 것은 그 순서를 엄격하게 지켜야만 수석감으로 돋보이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수석은 조물주의 작품이지만 인간이 소유할때 비로소 수석으로 다시 탄생되며 감상되는 대상물이 된다. 오늘날 감상되고 있는 수석이 다음 세대까지 음미되고 감상될 수 있도록 그 체계가 확립되어야 하며 이러한 체계는 어떤 개인적인 왜곡이 있어서는 안된다. 다음 세대에까지 올바른 애석문화를 영위할 수 있도록 그릇되게 변형된 형태가 없어야 할것이다. 수석의 긴 세월감은 인간이 모두 읽을 수 없는 무한의 세계를 가지고있다. 다시말하면 인간이 셈할 수 있는 마지막 단위인 수량수(數量壽)가 수석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조물주의 능력이나 재능은 인간의 상상하기에는 더욱 더 깊고 심오하기 때문에 조물주가 만든 조형물을 인간의 행동과 생각으로는 쉽게 접근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수석감 속에 내재된 조물주의 뜻을 읽고 풀기에 쉽지만은 않다. 인간은 이 조물주의 조형물인 수석을 탐석,소장,감상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나름대로 음미한다. 애석생활의 첫째 조건인 탐석은좋은돌을가질 수 있게 되는 기회인데 탐석을 통하여 산지적응과 수석감의 특징을 알게 된다. 두번째 조건이 소장은 단어 그대로 소유하는 것인데 비슷한 산지에서 비슷한 형태의 두 점 이상 돌을 소장하고 있을때에는 그 두가지의 돌들이 대비되어 좋은 돌을 가려낼 판단력을 길러 주기도 한다.  이러한 탐석과 소장의 다음 단계가 감상이다. 이러한 감상은 특히 수석 전시장에서는 다양하게 일어난다. 여러 사람의 선택을접할수 있는 감상의 기회가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수석을 감상할 때에는 모든 체험과 미의 감각이 발동한다. 이렇게 돌만이 가진 미가 리에게 탐석,소장,감상으로 근되어 오는 것은 그것을 재화로 보기 때문이 아니고 신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정신의 값어치로 보기 때문이다. 즉,밝고 투명한 시선과 정신의 잠재력으로 수석의 아름다움을 만나야만 비로소 수석이 지니고 있는 깊은 신비로움을 채득할 수 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슬리지 않는 애석생활만이 조물주의 솜씨로 이룩된 명품의 진가를 알아 볼 수있다. 이렇게 안목이 깊고 풍부한 수석인은 심미안이 발동되어 명품의 선별력이 범인보다 뛰어나다. 신의 심오한 뜻을 조금이나마 알아차리면 이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이다. 돌을 보면 늘 그런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수석을 보는 조건이 훌륭하게 맞아 떨어지면 감탄하게 되고 돌이 일품석으로 격상된다. 경험이 많고 수석에 대한 이론이 체계적인 수석인의 안목은 수석속에 내재된 공감성을 이끌어 내기에 다른 사람들 보다 뛰어나다. 수석에서 미가 느껴지면 말을 잊고 혼을 빼앗기겨서 무언의 자세로 석상처럼 굳을 수도 있다. 혼을 빼앗긴 듯한 기쁨의 대상물. 그 진한 전율은 미의 대상에서만 발휘되는 감탄사이다 이러한 기쁨을 인간의 언어로는 다 표현하지 못한다. 이는 수석의 경지가어느정도높아질때 더욱크게 일어난다. 이처럼 감탄의 대상인 수석에서 그 안목을 키우는데 첫째의 조건은 자주 접하는 것이다. 전시회 관람과 탐석, 석우 방문 등 을 통하여 그 안목이 자연적으로 높아질때에는 연출되어 있지 않아도 돌이 자리했을 때의 감상도가 머리 속에 그려진다.   자료: 월간애석 199?년 7월호 에서 발췌…
  • 38
    작성자 수석넷 작성일 07-07 조회 347
    운제 선생의 애석세계와 그의 풍모 우리 수석계에서 빼놓을수없는 원로 한분이 바로 포항의 운제(雲齊) 정윤모(鄭允誤) 선생이다. 40대에 수석에 매료된지 올해로 20여년이 넘는 돌과의 만남을 운제(雲齊) 정윤모先生  한시도 게을리 한적이 없는 수석계의 산 증인, 운제 선생은 정신문화로서의 수석문화뿐만 아니라 생활의 미덕으로 애석정신을 손수 실천하여 많은 석인들에게 참 애석인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1987년 회갑때 한권의 석보로 펼쳐놓은 애석의 세계는 지금까지 많은 석인들의 지침서와도 같은 역할 을 해오고 있는데 그때 ‘雲齊의 愛石과 그의 風鎬 라는 제목으로 운제 선생에대한 회고를 써 놓은 석오(石惜) 장중근씨의 표현을 빌리고자 한다. 운제 선생은 스스로를 나타내지 않으려 해도 그 풍기는 인격과 교양미가 고매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수석때문에 더욱 성숙 되어졌으리라고 확신한다. 나는 1983년 여름에 자연미생활 잡지에 그의 수석들을 소개히면서 이런 글을 쓴 바 가있다.  "성숙된 경지, 수석의 참다운 의미를 마음과 몸에서도 풍기는 멋, 인생의 반려자로 누리는 수석"  이러한 세계속에 취미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분이 정윤모씨다. 상면하여 대화를 나누며 수석을 감상해 보노라면 수석 앞에서 전혀 속태를 보이지 않는 순수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어서,과연 보기드문 진실한 애석가로구나 하는 감회에 젖는다. 탐석에서 건강을 유지하고 감상으로써 정신을 살찌우는 그리고 수석 자체가 속진(俗塵)에 물들지 않도록 하려는 점잖은 지성과 교양은 누구나 본 받아야 하다고 생각한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진열된 수많은 운제 선생의 애장석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일부 선별된 그의 석보에서는 얼른 느끼기가 어렵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 형제애의 정다움같은 기풍이 감돌고 있다. 구성으로 본다면 대칭적이라 할까, 점과 선과 면,그리고 봉우리와 구렁 ,굴곡 따위가 거의 쌍으로 이뤄지는 취향이며,외롭게 하나로만 이뤄진 것이 흔치 않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음양의 조화이다 음이 있으면 반듯이 양이 따르듯이 움푹한 곳에는돌출부가 곁에 있어야 하고,한 봉우리 옆엔 또 하나의 봉우리가 솟아 있기 마련이다.  운제 선생은 이렇게 맞선(대칭) 상태를 좋아한다. 그래서 애장석들을 보면 변화가 많이 보인다. 한마디로 외로운 것을 기피하는 성품인 것 같다. 항시 관찰해 보면 두개 이상의 모양이 함께 자리잡은 상태의 돌에 대하여 마음이 흠빽 쏠리는 것이다  다음,나이먹은 돌,즉 늙은 돌(老石)에 집착하는 경향이 짙다. 늙음은 성숙의 의미이며 태고의 자태이다. 익지 않은 것보다 무르익은 것,즉 노숙(老熟)한 것,이런 선호의 탓으로 애장석들은 거의 주름 굴곡의 변화가 많이 잡혀있다. 물론 선과 면의 흐름이 부드럽게 이어진 돌들도 꽤 있지만,단조로운가운데 노숙의 기운은 모두 담겨 있다.  세번째로 운제 선생은 리듬의 변화가 적은 고요한 음악은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장단고저의 변화가 강렬한 음악을 썩 좋아할 듯 싶다 이것은 애장석만 보아서도 느껴지고 있다. 외견상으로는 조용한 성품인 듯 하지만 내면에는 타오르는 박력으로 넘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사업 의욕이 넘치고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운제 선생의 수석 취향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리듬이 힘차게 흐르는 돌을 선호하게 됨으로써 굴곡변화가 있는 것에 마음이 흡수되는 것이다. 변화가 힘찬 상태를 완성하면서 거기에 자신의 타오르는 심성을 조화시켜 내면의 안정을 찾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운제 선생은 행복과 평화를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석오 장중근)   이번호 본지를 통하여 운제 선생의 애석생활을 반추하고 후배 애석인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면 하는바람이다. 자료: 월간애석 1999년 9월호에서 발췌 …
  • 37
    작성자 수석넷 작성일 07-07 조회 469
    돌의 미학(수석문화 3월호)  역사를 통해서본 우리 수석의 과거와 미래.  들어가면서 영국의 역사학자 카(E. H.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습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가 역사를 배우면서 과거 세계와 만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역사를 사실적으로 조명하는 일은 과거의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여, 현재를 사는 우리의 성장을 약속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미래를 향한 바른 안목을 길러나가는 길이기도 합니다.우리도 ‘수석이 어떻게 나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수석의 역사를 조명하고, 그 역사적 배경은 무엇이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우리의 수석 역사는 주변국(周邊國)의 수석문화와 더불어 짧지 않은 이력(履歷)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애석연구소 소장 장동균은 ‘애석문화 시원과 전개’에서, ‘고조선의 삼신산(三神山)문화가 중국으로 건너가서 석가산(石假山)의 문화로 발전했고, 이것은 또 일본의 정원(庭園)문화를 이끌었다.’고 밝혔습니다. 수석의 원류(原流)가 자랑스럽게도 우리나라로부터 주변국(中國, 日本)에 전파되어 수석을 보편화하고 정착시켜서 문화로 꽃을 피웠습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우리와 주변국들도 서로의 선진 수석 문화를 주고받으면서 각각의 역사를 써왔던 것입니다. 우리 수석의 역사를 크게 조선시대의 고전수석과, 해방 후 산수경석 위주의 근대수석, 그리고 바다돌이 본격 합류(合流)한 현대수석으로, 세단계로 구분하여 고찰해 보았습니다.  1. 고전수석 중국(宋)과 조선시대의 수석(壽石)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송대(宋代)의 애석인(愛石人)은 미불(米芾), 석도(石濤), 소동파(蘇東坡), 구양수(歐陽脩)등이었으며, 이들은 당대(當代)의 대학자이자 시서화계(詩書畵界)에서 일가(一家)를 이루었던 저명한 인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수석을 소재로 시와 그림 그리고 글로서 많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유구한 중국의 역사와 더불어 수석문화도 승계되어 송대(宋代)의 열렬한 애석정신은 미불(米芾)에게서 완숙의 절정에 도달했다고 전해집니다.우리의 수석문화를 꽃 피웠던 조선시대의 선배 애석인들은 황산 이 유근, 퇴계 이이, 추사 김정희, 인제 강희안, 다산 정약용, 단계 김영면, 우봉 조희룡 등입니다. 이들은 조선의 대학자이자 훌륭한 예술가들로서 당시 동양 문화를 선도했던 중국의 문물을 쉽게 접할 수 있었고, 또 중국을 왕래하면서 교류가 가능했던 지도층인사들이였습니다. 이들이 중국의 문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중국의 애석풍류에 영향을 받았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조선의 선비정신과 수석관(壽石觀) 송대(宋代)의 애석인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애석인들은 수(數)적으로 많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학식과 덕망이 높고, 예술적 소양을 갖춘 유명 인사들이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는 유교적 윤리였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굽힘 없는 지조와 절개,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청빈한 기개, 그리고 부끄러움 없는 양심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겼습니다. 이런 선비들에게 있어서 돌은 인간에게 불완전성· 변절성(變節性)을 초월한 어떤 절대적인 힘의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돌이 갖고 있는 미적가치(美的價値)보다는, 유교적 가치관에 기초하여 선비들 스스로의 시각을 통해 터득된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돌의 덕목(德目)을 통해서 개인의 인격 수양을 비롯하여 사회적 윤리관까지도 배양할 수 있는 교훈적 의미를 찾아냈던 것입니다. 또, 돌을 하나의 벗으로, 스승으로 인식하여 돌을 닮으려 노력했고, 돌을 통해 자신을 수양해 나갔습니다. 이것은 ‘자연 속에서 돌과 같은 무기물(無機物)에서 조차도 스스로 본성(本性)을 지니고 있으며, 그 안에는 무언의 질서와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성리학(性理學)의 세계관에 기초한 것입니다. 독특한 수석문화의 형성 이러한 당시의 사상적 배경으로 인해 우리 선배들은 우리만의 독특한 수석문화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 대표적인 일례가 그들이 선호했던 괴석(怪石)에 대한 나름대로의 독특한 수석관(壽石觀)입니다. 물론 지질학적(地質學的) 특성으로 인해 괴석(怪石)의 질(質)과 형태(形態)가 서로 다른 점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중국은 ‘괴석(怪石)의 단조로움 보다는 변화 있는 형태의 웅장함과 외형에서의 미(美)를 발견’하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반면에, 인제(仁齊) 강희안이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선배들은 ‘괴석(怪石)은 굳고 곧은 덕을 지니고 있어 군자의 벗이 됨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우리 선배들은 돌의 외형(外形)보다는 돌의 존재를 자기 자신과 동일화(同一化)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항상 높은 정신적 세계로 돌을 관조하려는 형이상학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2. 근대수석 우리의 ‘선비문화’는 조선말 일제강압기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서구의 근대적 방법과 의식을 주로 일본을 거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여건은 주변국 중에서 가장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리고 해방을 전후하여 일본을 왕래했던 지식인들을 통해서 서구의 근대적 문물과 함께 일본의 수석문화가 소개되면서 6. 25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국내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수석문화 일본의 큰 특징 중 하나가, 외국문물에 대한 도입과 정착 그리고 그것을 뛰어 넘는 토착화를 잘 하는 것입니다. 헤이안시대에 일본은 ‘귀족문화’의 전성기를 맞아 특히 다도(茶道)와 꽃꽂이 그리고 정원술 등이 발달했습니다. 예술이 도(道)의 관념과 결합하여 일본 특유의 예도(藝道)의 사상이 정착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백제(百濟)에서 일본에 전달된 수석과 조경술(造景術)등이 일종의 예도(藝道)로서 재탄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수석도 기본요소를 잘 파악해서, 그 핵심이 되는 형(形)에 대한 기준에 대해서도 깊은 연구를 통해서 그들 특유의 토착화를 완성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산수경석의 기본 형태와 연출. 유럽인들이 인체(人體)를 ‘가장 이상적 미(美)’라 생각하여 인체를 조각하거나 인간 중심의 그림을 즐겨 그렸던 것에 반(反)해서, 동양인들은 자연과의 친밀한 경험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를 화폭에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재들을 화폭에 담기 위한 기초교육의 중요성에대한 인식과 더불어 이에 대한 지침서들이 만들어졌습니다. 명(明)의 동기창이 쓴 “화선실수필(畵禪室隨筆) 과 청(淸)의 심심우가 편집한 ”개자원화전초집(芥子園畵傳初集)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교육용 지침서들의 영향을 받아서 산수경(山水景)을 형태별(形態別)로 분류하여 정리한 것이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는 단봉형, 쌍봉형, 연봉형, 섬형, 갯바위경, 평원석 등의 개념과 기본형(基本形)들입니다. 그리고 산업의 발달로 인해 다양한 수반(水盤)이 준비되어 산수경석(山水景石)을 이상적인 연출로 완성 시킬 수 있었습니다. 수석의 시원인 삼신산과 석가산 그리고 소정원의 이상(理想)처럼 말입니다. 근대 수석의 도입과 문제점 일본수석의 유입은 우리의 수석문화를 변화시켰습니다. 수석의 기본요소인 형(形), 질(質), 색(色)의 이론이 도입 되었고, 또 위에서 언급한 형에 대한 기본 형식이 마련되어서 누구라도 쉽게 수석을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연에 대한 유별한 우리민족의 애정은 곧, 이 신비한 산수경석(山水景石)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소수 선택 받은 사람만이 접할 수 있었던 수석이, 이제는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는 대중적 취미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수석의 대중화라는 ‘얻음’도 있었지만, 우리 선배들의 훌륭한 정신세계가 물질의 풍요 속에 실종하게 된 ‘잃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의 순수한 소산물(所産物)인 수석이 항상 공급부족(供給不足)이라는 상업적 논리 속에서 처(處)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3. 현대수석 바다 돌의 등장과 변화의 요구 1990년을 전후(前後)해서 산수경석 위주의 수석세계에 바다돌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바닷가와 인접한 지역의 애석인들에게 바다돌이 탐석되어서 사랑을 받아 왔지만, 본격적으로 전시에 출품을 했던 기간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이 바다 돌의 등장이 수석세계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큰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근대수석에서 기준으로 삼았던 ‘경석(景石)위주의 사실적이고 이상적이며 고전적인 미(美)’의 추구에서, 바다 돌에서 요구하는 ‘현대적이고, 추상적인 다양한 미(美)의 수용’이라는 현대미술과 똑같은 ‘추가적 요구’였기 때문입니다. 보들레르의 여파(餘波) 이런 바다 돌의 파장(波長)은 마치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가 미술계에 주었던 충격과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1846년, 그는 프랑스 ‘살롱’지의 평론에서 ‘인간의 일상적 삶과 그 과정에서 무명성, 하잘 것 없는 일상성의 위대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완전하고 영원한 미는 존재 않는다.’고 보고 ‘찰나적인 것, 덧없는 것’에서 ‘참다운 아름다움’이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이후 논란이 거듭된 끝에, 결국 회화의 소재에 ‘우리의 하잘 것 없는 일상적인 삶’도 포함되면서 다양하게 묘사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밀레’의 ‘만종’ 또 ‘이삭 줍는 여인’의 시골 농부를 배경으로 한 일상적 삶의 그림이 불후의 명화(名畵)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수석관의 확립 이와 같이 수석도 이상적이고 한정된 소재에만 머무를 수 없으며, 모든 다양한 소재를 다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현대수석이 해야 할 일입니다. 다양한 미(美)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의 확립과 강석(江石)과 바다 돌을 동시에 포용할 수 있는 기존(旣存)이론의 수정과 보완이 필요합니다. 독일의 미학사상가인 실러는 ‘정신에 말을 걸지 않고 감각적 이해관계만을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은 하찮고 천박하다.’고 했습니다. 사실 밀레의 그림이 명화로 인정을 받게 된 내면에는 그 ‘하찮음’을 ‘숭고함’으로 승화시킨 작가의 ‘정신’이 그림 속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작가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하찮음’이 ‘숭고함’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현대 수석을 발전시키고, 완성하기 위해서는 ‘근대수석의 물질적, 감각적 접근에서 벗어나, 우리 선배 들이 관조했던 높은 정신세계와 현대수석이 요구하는 미학적 사고의 접목을 통한 새로운 수석관의 확립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수석의 역사는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 ; 석정(石停) 이강군 현, 부산 완석회 회장출처: 나라수석 카페 -> http://cafe.daum.net/narastone…
  • 36
    작성자 수석넷 작성일 07-07 조회 266
    우리나라 현대 수석계를 가장 강렬하게 이끌어온 애석인 중에 한 명이 바로 (사)애석인협회 고문이자우리나라 최초의 수석박물관을세운부천수석박물관의 중암정철환관장이다   우리 수석계에선 그가 항상 중심에 서 있었고 음으로 양으로 큰 버팀목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부천수석연합회를 창립하여 수도권에 수석의 바람을 일으켰고 다양한 애석활동으로 우리 수석의 대중화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애석인이기도하다. 외형적으로는 풍성하지만 내적으로 침체되어 가고 있는수석계에 중암 정철환관장의 역량이 어느때보다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부천수석박물관 안내 홈페이지: http://www.bcmuseum.or.kr/경기 부천시 원미구 춘의동 8번지 (종합운동장 내) 전 화 : (032)655-2900,666-2900 팩 스 : (032)613-2900 관람시간 : 10:00~ 18:00 (3월~10월)                10:00 ~ 17:00 (11월~2월) 휴관일 : 매주 월요일,1월 1일, 설날 및 추석, 공휴일 다음날  자료: 월간애석 2006년 6월호 에서 …
  • 35
    작성자 수석넷 작성일 07-07 조회 238
    나는 돌이었다둥근돌은 둥근돌끼리, 모난돌은 모난돌끼리 불평없고 부족함없이 자연의 한 축이 되어 산, 바다, 강 등에서 잘 살고 있었다그러다 어떤이에게 선택되어 나를 어루만지며 사랑하겠노라고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자며 나를 데리고 갔다나를 씻기고 난후 수석이란 이름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순간의 행복을 즐기고 있었다돌이라는 이름으로 살때보다 수석이란 이름으로 살게 되면서부터 참 많은 말을 듣게된다이 부분이 조금만 둥글었으면.. 이부분이 조금만 더 파였으면...여기 이부분의 사선이 ..또는 이 부분의 상처가 있어서... 등 돌이란 이름으로 살때는 전혀 듣지 못했던 말들을 듣게 되었다.돌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날벼락인 것이다자연속에서 잘 살고있는 자신을 사전 동의없이 맘대로 자리를 옮겨 수석이란 이름을 붙혀 놓고서는 이쁘게 보여햐 한다면 강제로 기름범벅으로 화장을 한답시고 날마다 문지르더니 그것을 본 어떤이는 말이 많다.수석이란 이름은 이렇게 말이 많아야 한다면 난 돌이란 이름이 좋다.원래대로 조용히 자연속에서 살고 싶은것이다수석은 자연(自然)이다. 자연(自然)이란 원래 그대로 라는 뜻이다자연을 제대로 아는 수석인라면 생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지나친 자신만의 욕심을 버리고, 아쉬운 부분의 욕심을 버리고 지닌 그대로의 아름다움에 만족하며 함께 공감해야 하는것이다그래야만 자연인이라고 말할수 있는 것이다몇년을 깍고 다듬어서 만든 돌조각도 100점 만족이 될수 없는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인것이다. …
  • 34
    작성자 수석넷 작성일 07-07 조회 305
    석오 장준근님의 수석(壽石)과의 대화(對話) ( 2001. 2. 16   우석 정우권 옮김 ) 이 글은 "분재수석 54호(1982년도 3.4월호)에 실린 석오 장준근님의 글을 두 번에 나누어 옮기는 것입니다. 수석을 하는 사람들은 곧잘 "수석과의 대화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떤 대화를 나누느냐고 물으면 일반적으로 우물쭈물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스스로 수석과 대화를 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대화의 내용을 전혀 표현하지 못한다.  진실로 스스로가 수석을 바라보면서 대화를 하는 애석인일까 하고 한번쯤 성찰해 보는 것은 자신을 위해 대단히 요긴하다고 생각한다.  이 성찰에 의하여 취미의 격조가 어느 수준에 이르고 있는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될 것이며, 스스로가 정말 애석을 하고 있는지도 알게 되리라 믿는다.다시 말하면 자신이 열렬하게 애석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인지 또는  어중간하게 멋모르고 수석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 수준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이 수석대화의 내용을 스스로 가늠해 보는 것이 좋으리라 믿는다.   자신의 애석생활이 어느 단계에 이르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점을 풀기 위하여 어느 애석선배에게 평가를 의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보다는 수석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가 하는 자신의 처지를 몸소 헤아려 보는 것이 빠른 첩경이다.요사이 수석하는 사람들을 만나볼 때마다 진실로 애석을 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대하여 의심스러울 때가 자주 보인다.  그리고 수석의 길을 잘 못 생각하는 사례도 자주 눈에 뜨인다.  이것을 단적으로 말한다면 수석과의 대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대화의 단절을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첫째, 수석에 대한 상식을 옳게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혀 수석이랄 수 없는 몽돌(?)을 탐석하여다가 모셔 놓고 보니, 그 돌에 대한 이야기거리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둘째, 수석정서가 사막처럼 메말라 있다는 점이다. 특히 번거로운 도시생활 속에서 생존의 갈등에 결박된 사람들의 마음은 정서를 품을 여지가 없어서, 수석을 보면 돌덩어리의 파편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그러면서도 허황되게 수석이 좋다고 한다.  진실된 수석생활을 누리려 한다면 수석과의 대화가 이뤄져야 한다.  수석에의 대화는 그  수석을 바라보고 어떤 이야기거리가 성립될 때 익어가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얼마던지 길어질 수 있으며, 그 내용은 갈수록 풍요로워 질 수가 있다. 그런데 하나의 수석을 바라보며 "아, 좋다"하는 이야기 이상을 더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수석을 보고서 "좋다" "명석이다"하는 말을 끝내고 나면 그 수석을 더 이상 바라 보고자 하지도 않는다.  이런 정도의 것으로서 수석 감상이 이뤄져 버린다면 아직 수석입문조차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해야 한다.하나의 수석을 보면 적어도 1분에서 10분 이상 마음을 쏟아 감상하는 사이에 자꾸 이야기가 생겨야 한다.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리는 대화의 광장이 수석과 나의 마음 사이에 펼쳐져야 한다. 이 이야깃거리는 맨 처음에 관찰로부터 시작된다.  피부와 굴곡, 주름의 자태, 전체의 모양이 어떤 생김새로 이뤄져 있는가 하는 요모조모의 관찰이 이뤄지노라면 10분, 20분이 소요된다.  그리고 이 부분이 이렇게 생겼으면, 저 봉우리가 이 만치 높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욕심도 부려본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수석과 견주어보고 또 과거에 다른 사람의 수석을 보아 왔던 갖가지의 것을 떠 올려보며 비교해 본다.  이렇듯 수석을 관찰하는 짧은 시간조차 지닐 줄을 모른 채, "아, 좋다"하고 1초(?)만에 감상이 끝나 버리면 수석과의 대화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 한 수석을 처음 만났을 때의 관찰, 이것은 수석과의 대화의 다리 역할밖에 안된다. 즉, 문턱에 들어서는 대화의 길목이다.  이 관찰의 시간을 넘기고 나면, 비로서 수석과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수석과의 대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노라면, 그 수석의 결점(아쉬운 요소)이 떠 오르지 않으며, 그 수석을 향한 욕심도 일어나지 않는다.  애석인을 품에 안은 듯 포근한 기분으로 그 수석을 품에 감싸 안았는지, 수석 그 자체 속으로 나의 마음이 빨려 들어갔는지 여하튼 어떤 요람 속에 잠기게 된다.  이러한 경지로 몰입됨으로서 수석은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나는 수석에게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지에 빠지게 되면 수석을 보는 시간이 하염없이 길어진다.  하나의 좋은 수석을 입수하고 나서 사흘 밤이나 이불 속에 품고 잤다는 옛 기록따위는, 다 수석의 삼매경에 파묻혔기 때문이며, 비로서 대화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수석이 나에게 말을 걸어 올 때에 그 언어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데 형용키 어려운 생명적인 것이 은연하게 가슴으로 와 닿는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위안을 받는다.  흥취를 느낀다. 수석을 바라보며 위안을 받고 흥취를 느끼다는 것이 즉 수석이 나에게 건네주는 말씀인 것이다.한 수석을 오랫동안 바라보자 하니 무릉도원(武陵桃源)과 같은 평화로운 선경이 안개처럼 피워 오를 때, 이것이 수석이 나에게 안겨 준 소리 없는 말이 되는 것이다. 수석은 굳고 움직이지 않으며, 감각이 없지만, 수석이 춤추는 영상을 안겨 줄 때, 그 수석은 몸짓으로 나에게 감흥을 안겨 준다. 꽃무늬가 아롱진 수석에서 그윽한 향기내음을 맡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 향기가 수석이 나에게 일러 준 말인 것이다.수석이 생명적인 것, 살아 있는 것으로 여겨짐으로서, 수석이 발산하는 깊은 언어를 체험하게 된다.  이 체험을 겪음으로서, 나는 반사적으로 수석에게 이야기를 하게 된다.  내가 수석을 향하여 전파의 흐름과 같은 언어를 보낼 때 그 내용은 어떤 것일까? 하나의 산수석을 바라보고 있다 하자.  산 봉우리가 비죽비죽 솟은 험산에 무수한 골짜기와, 계류와, 폭포와, 구렁과, 벼랑과 바위를 실제의 것으로 느끼기 시작할 때, 다시 말하면, 주먹만한 돌이지만 실지의 설악산과 같은 영상을 떠 올릴 때, 나는 그 산수석(山水石)에서 노니는 기분에 잠기게 된다.  그리하여 골짜기를 타고 벼랑을 오르다가 맑은 계류에서 목욕을 한다.  이것이 바로 신선들만이 노닐던 심산유곡(深山幽谷)이구나, 저 노송(老松)의 운치와 신기한 꽃들....  이러한 생각들을 그 산수석에 보낼 때,  이것이 내가 수석에게 보내는 언어가 되는 것이다. 기도하는 모습의 물형석(物形石)을 바라볼 때, 그 모습은 나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 같은 감사의 마음.... 웅크리고 앉아 고통스러워 하는 듯한 물형석을 바라보고 나는 가슴 아파 하면서 내가 지닌 번뇌를 깨우치는 순간......   이러한 생각이 바로 내가 수석에게 보내는 나의 언어가 된다.  동시에 수석이 나에게 건네주는 언어이기도 하다.이런 류가 수석과의 대화인 것이다.  수석과의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은 애석생활에서 가장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며, 이러한 오류 때문에 수석인들의 저질성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수석과의 대화란 미적체험(美的體驗)을 통한 상상세계이다.  상상의 날개를 펼칠 줄 모르는 수석 감상은 성립되지 않는다. 아름다운 상상은 정서에서 이뤄진다.  꿈과 같은, 우유와 같은 기름진 정서 감정일수록 상상의 세계는 날로 깊어지고 아름다워진다.요새 수석인들은 정서가 메말라 있어서, 자유로운 상상 세계를 마음껏 발휘하지 못한다.  마음속에 단비가 축축히 내리고 있을 때 상상은 아름답게 펼쳐진다.  마음속에 가믐이 들어 있으면 가믐에 곡식이 자라지 못하듯, 수석감상이 이뤄지지 못한다. 그리하여 수석과의 대화가 결핍되고 마는 것이다.  가믐이 들면 단비가 내려야 하듯 메마른 정서에 영양제가 필요하다.  이 영양제란 인간을 가징 더럽히는 갈등, 질시, 사욕  따위를 없애는 것에 있다. 적어도 수석을 바라보는 순간만은, 이곳에만 얽매이던 조바심과 남을 미워하는 생각, 또, 탐욕에 빠져 있는 자신을 잠깐이나마 잊어 버려야 한다.  그러면 스스로의 정서가 안정된다.  정서가 안정되면 천천히 안온함을 느낀다 이 고요해져 가는 마음속에서는 이윽고 저절로 자유로운 상상의 날개가 힘차게 펄럭거리기 시작한다. 상상이 날개를 휘저을 때, 수석셰계의 감미로움을 맛보게 되며, 마침내 수석삼매경으로 몰입된다.   이로부터 정상적인 감상이 이뤄져 윤택한 수석과의 대화가 멋지게 오고 가게 되는 것이다. 수석과의 대화란, 상상 세계가 무한하듯이 역시 끝없이 뻗쳐 가는 전파와 같은 것이다.  오늘날의 수석인들 중에서는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수석을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자세가 정립되어 있지 지 않기 때문이다.  수석감상은 어떤 길로 가야만 옳은 것인가 하는 것조차 모르고, 수석과의 대화를 주장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이다.하나의 수석을 바라보고 상상의 날개를 펼칠 줄을 모른 채, 건성으로 슬쩍 보기만 하고는 "나쁘다" "좋다"를 함부로 내 뱉는 사례들 때문에 좋지 못한 파문이 일기도 한다. 수석과의 대화를 갖지 못하는 사람은 첫째, 탐석하여 온 돌을 마구 쌓아놓기 십상이다.  둘째, 수석을 고이 모실 줄을 모르며, 셋째, 애석의 예절을 지키지 못하며, 넷째, 수석을 모두 통달한 것처럼 자만하며, 다섯째, 수석평을 함부로 행하며, 여섯째, 수석으로 허세만 부릴 줄 알며, 일곱째, 경륜이 깊은 선배를 눈 아래로 뭉개 버리며, 여덟째, 진실된 수석담(壽石談)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장준근님은 누구?장준근님은 우리나라 수석계의 선구자 중의 한 분이셨습니다.우리나라의 수석이 사회적으로 크게 인정 받지 못하여, 불모지나 다름 없던 1973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수석잡지인 격월간지 "분재수석"을 창간하여, 중간(1983년)에 "자연미생활"로 잡지명을 바꿔서 15년 동안 발간하여, 근대 우리나라 수석의 이론적인 발전과 수석인구의 저변확대에 크게 이바지하신 분입니다."정통수석취미"를 비롯하여 여러 권의 수석관련 저서를 남기셨고, 나중에는 산야초에 심취하여 경향신문, 무등일보, 한국일보등에 산야초 관련 기사를 연재하였고, "병을 물리치는 산야초"등 여러 권의 저서도 남기셨는데, 작년에 아쉽게도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가신 님의 명복을 비는 바입니다. 자료 출처: 우석  정우권 http://www.wseok.com/ …
  • 33
    작성자 수석넷 작성일 07-07 조회 250
    愛石生活에서의 得失  韓  基  澤 口 얻은 것 애석 생활 중에서 내 몸이 약체만은 아니라는 것을 신발견한 것. 나는 어려서부터 싸움을 하나 씨름을 하나 또 팔씨름을 하나 늘 지기만 하였고, 학교에 입학한 후로도 달음질을 하면 으례히 꼬트머리로 떨어져서 체조시간이나 운동회를 제일 싫어하였다. 싸움같은 것은 질 것이 뻔하므로 아예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슬슬 피하기만 하는 비겁한 소년으로 낙인이 찍힌 것은 물론 자타가 약체라고 공인했다. 이렇게 평생을 살아왔는데 탐석을 시작하면서 나에게는체질상에 기적이 생긴 것이다. 즉단양 탐석을 4,5명이 동반하여 갔는데 리이더 격인 등산가 K씨를 끝까지 따라 다니며 제대로 탐석한 사람은 나 하나 뿐인 것을 알았고, 다른 사람들은 낙오되었거나 불연이면 쉬염쉬염 따라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어려서부터 약하다는 누명을 벗기 위한 나의 전심전력을 다한 결과이고, 다른 사람들은 탐석 자체를 그리 소중히 여기지 않았을 것이며 또 그렇게 악착같이 따라가면 무슨 소득이 있으랴 하는 우연한 결과이겠지 하면서도 나자신 의아스럽기 한이 없었다. 그뿐만은 아니다. 의료개업 시절의 탐석은 대개 일요일을 이용하여 다녔는데, 토요일밤 9시에 청량리역을 출발하여 일요일 오전 1 시경 단양역 著, 충북도내는 통행금지 시간이 없으으로 새벽 2시경 단양읍내 여관에 투숙, 아침 6시에 숙소를 나서서 하루 종일 탐석, 석양에 귀로하여 수석을 정리, 화물에부치 고 나면 밤 9시가 된다. 저녁밥을 드는 둥 마는둥 하고 단양역에 나와 월요일 새벽 한시나 두시에 기차를 타고 청량리역에 도착되는 시간이 아침 6시다. 바로 집에 들어와서 조반을 마치고 병원에 출근하면 9시 정각, 출근에 아무 지장이 없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근무에도 하등의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36시간 잠도 제대로 못자고 중노동을 한 셈인데 약한 나의 체질로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 이상하다. 그런가 하면 이런 탐석에 동반하였던 동료들은 2,3일간 피로하여 못견디겠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탐석을 거듭하므로써 나의 체질은 약한것만은 아니라 건강체임을 발견하였고 自信도 갖게 되었다. 다음에 은퇴 후 무료를 모르게 된 것. 은퇴 후 친구들을 만나면 요새는 무엇으로 소일하는가 무료하지 않는가 하며 위로조로 말하는 사람이 많으나, 나는 결코 무료하지 않다. 수석,정원,분재 손질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다음 이로운 것은 청년층의 친구와의 교우하는 것. 노인티 내기를 싫어하는 나는 노인들이 잘 모이는 다방에도 가기를 꺼려한다. 또 내 나이의 노인 탐석가를 별로 보지 못하였고,探石을 하다보면 年少靑年이 많아서 저절로 靑年과의 交友를 갖게되니 다행이지 무엇이겠나. 口 잃은 것 첫째, 간첩으로 오인 당하는 사례. 근래는 강변에 사람들이 오락가락하면 으례히 탐석가들인줄 알지만, 초창기에는 수석이 무엇이며 탐석이 무엇인지 설명하여도 이해하는 사람이 희귀하였다. 한 번은 경찰서에까지 연행되어 조사받았고, 명함을 제시한 후 그 지방 개업의에게 전화로 연락하여 겨우 신분이 명확해져서 봉변을 면한적이 있다. 다음 老人 친구가 멀어지는 것. 저 사람은 늙은이 답지 않게 배낭이나 메고 다니며 靑年들과의 접촉이 많다해서 저절로 老人 친구가 멸어진 것이다. 또 여관이나 택시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것. 배낭을 메고서 투숙하려거나 택시를 잡으려면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한다• <1978 年 9 月〉  …
게시물 검색







Copyright © 수석넷. All rights reserved.